테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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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이 도는 류큐 왕국의 관료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그는 구메무라 출신으로 중국 유학 후 외교 활동에 참여했으며, 1606년에는 왕의 측근인 산시칸이 되었다. 류큐가 사쓰마의 침공을 받았을 때 나하 항구 방어를 지휘했으나, 결국 사쓰마에 항복하지 않고 참수되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가라테 실력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며,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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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 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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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테이 도 |
원어명 | 鄭迵 |
원어명 (언어) | 일본어 |
일본 이름 | 쟈나 웨카타 리잔 (謝名 親方 利山) |
자 | 리잔 (利山) |
직위 | |
직위 | 류큐의 삼사관 (丑日番三司官) |
임기 시작 | 1606년 |
임기 종료 | 1611년 |
전임자 | 구스쿠마 세이큐 (城間 盛久) |
후임자 | 윤탄자 세이쇼 (読谷山 盛韶) |
군주 | 쇼네이왕 |
다른 직위 | 류큐의 총리당영사 (總理唐榮司) |
총리당영사 임기 시작 | 1580년 |
총리당영사 임기 종료 | 1611년 |
총리당영사 후임 | 사이켄 (蔡堅) |
품계 | 우에카타 |
개인 정보 | |
출생 | 1549년 |
출생지 | 류큐왕국 구메촌 (久米村) |
사망 | 1611년 10월 24일 |
사망지 | 일본 사쓰마번 가고시마 |
아버지 | 테이 로쿠 (鄭禄) |
형제 | 남동생: 테이 슈 (鄭週) |
2. 생애
테이 도는 류큐 왕국의 주요 학문 중심지이자 중국 식민지였던 구메무라 출신으로, 왕실 정부의 대부분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관료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다.[1]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6년 동안 베이징의 황실 학원에서 공부했다.[1]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조공 임무를 이끌고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궁정은 친중국 파와 친일본 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테이 도는 강력한 친중국 성향이었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 번을 통해 류큐 왕국에 임진왜란 지원을 위한 병력과 물품을 요구했지만, 쇼네이 왕은 테이 도의 조언에 따라 이 요구를 무시했다.[2]
1602년, 류큐 선박이 센다이 번 영내에 표류하여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이에야스에게 감사의 사절 파견이 자주 요청되었지만, 테이 도를 비롯한 류큐 관리들은 도쿠가와 막부에 어떠한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1609년, 류큐는 일본 사쓰마 번의 군대에 의해 류큐 침공을 당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의 호의를 보이라는 요구를 거부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테이 도는 나하 항구의 미에 성 방어를 지휘하여 초기 일본군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슈리 성과 왕궁이 함락되고 쇼네이 왕이 항복한 후, 왕과 다른 여러 관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3]
테이 도는 가고시마를 거쳐 슨푸로 이동하여 퇴역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으며, 시마즈 씨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여 참수되었다.[3] 테이 도와 가라테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그의 저항을 제압하고 처형하기 위해 여러 명의 병사가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9]
칭호는 오야카타.[9] 정씨호성전내 9세이며, 구메 삼십육성의 후손 중 한 명이다. 아버지 정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05년, 테이도는 법사관이었던 조간 오야카타 모리히사를 참언하여 백성의 신분으로 떨어뜨리고, 이듬해 스스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1609년 류큐 침공 당시 테이 도의 동향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세 개의 1차 사료[6]는 사쓰마군이 나하로 이동하기 전후에 쇼네이가 구시토 왕자와 삼사관을 인질로 내준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테이 도는 거기서 삼사관 중 한 명으로 언급될 뿐이다. 다른 두 사료는 테이 도 오야카타와 3000명의 병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서로 모순되며, 또한 1차 사료에 따르면 3000명의 병사도 그들이 이동하거나 싸울 시간적 여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묘는 없지만 같은 정씨의 문중(일족)에 의해 세워진 현창비가 원래의 구메촌에 가까운 나하시 와카사의 아사히가오카 공원에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명나라 유학
1565년, 16세 때 명에 관생으로 뽑혀 유학, 이듬해 난징의 국자감에 입학했다.[1] 1572년 귀국 후 도통사를 거쳐 장사가 되어 진공사절로 여러 차례 중국에 건너갔다.[1] 1580년, 총리당영사(구메촌 총역)가 되었다.테이 도는 류큐 왕국의 주요 학문 중심지이자 중국 식민지였던 구메무라 출신으로,[1] 왕실 정부의 대부분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관료가 되기 위한 길을 걷도록 선택되었다.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6년 동안 베이징의 황실 학원에서 공부했다.[1]
2. 2. 관료 생활 및 외교 활동
류큐 왕국의 주요 학문 중심지이자 중국 식민지였던 구메무라 출신으로, 왕실 정부 관리 대부분이 그러했듯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6년 동안 베이징의 황실 학원에서 공부했다.[1]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조공 임무를 이끌고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1606년[1] 57세의 나이로 왕의 최측근 조언자인 ''산시칸''의 일원이 되었다.당시 궁정은 친중국 파와 친일본 파로 나뉘어 있었다. 1602년, 류큐 선박이 센다이 번 영내에 표류하여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이에야스에게 감사의 사절 파견이 자주 요청되었지만, 류큐 관리들은 도쿠가와 막부에 어떠한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1609년, 류큐는 일본 봉건 영지인 사쓰마 번의 군대에 의해 류큐 침공을 당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의 호의를 보이라는 요구를 거부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테이도는 나하 항구의 미에 성 방어를 지휘하여 초기 일본군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슈리 성과 왕궁이 함락되고 쇼네이 왕이 항복한 후, 테이도는 왕과 다른 여러 관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그들은 사쓰마 번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끌려갔고, 이후 슨푸로 이동하여 퇴역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으며, 사쓰마의 시마즈 씨족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강요받았다. 테이도는 이를 거부하여 참수되었다.[3]
1565년, 16세 때 관생으로 뽑혀 명에 유학, 이듬해 난징의 국자감에 입학했다. 1572년 귀국. 그 후 도통사를 거쳐 장사가 되어 진공사절로 여러 차례 중국에 건너갔다. 1580년, 총리당영사(구메촌 총역)가 되었다.
1605년, 테이도는 법사관이었던 조간 오야카타 모리히사를 참언하여 백성의 신분으로 떨어뜨리고, 이듬해 스스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1608년 9월, 시마즈 이에히사는 이에야스와 히데타다가 배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이지지 류운 등을 보내 쇼네이 및 삼사관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드시 조빙할 것을 요구했지만, 테이도는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모욕하여 크게 승려를 욕되게 했다.[5] 이러한 경위로 이에야스의 명령이 마침내 내려져, 사쓰마 번이 류큐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1611년 9월 19일, 사쓰마 번에서 쇼네이 및 삼사관에게 기청문이 제시되었지만, 홀로 테이도는 굴복하지 않고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에히사는 소사를 보냈지만, 테이도는 이에 대해서도 항변에 이르렀기 때문에, 참수되었다.
2. 3. 류큐 침공과 죽음
테이 도는 1609년 류큐 침공 당시 나하 항구의 미에 성 방어를 지휘하여 초기 일본군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3] 슈리 성과 왕궁이 함락되고 쇼 네이 왕이 항복한 후, 테이 도는 왕과 다른 여러 관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3] 이들은 사쓰마 번 영주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끌려갔고, 이후 슨푸로 이동하여 퇴역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으며, 사쓰마의 시마즈 씨족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강요받았다.[3] 테이 도는 이를 거부하여 참수되었다.[3]테이 도와 가라테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그의 저항을 제압하고 처형하기 위해 여러 명의 병사가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9]
1611년 9월 19일, 사쓰마 번에서 쇼네이 및 삼사관에게 기청문(起請文, 충성 서약)이 제시되었지만, 테이 도는 홀로 굴복하지 않고 서명하지 않았다.[7] 그래서 시마즈 이에히사는 소사를 보냈지만, 테이 도는 이에 대해서도 항변했기 때문에 참수되었다.[7]
정사 "구양(249호)"은 "나센(懶仙, 쇼네이왕)은 권신(權臣) 테이 도의 말을 믿고, 마침내 빙문(聘問)의 예를 잃었다"라고 말하며, 테이 도의 말을 믿고 사쓰마에 무례를 저지른 탓에 정벌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8] 기안의 "기안일기"(쇼호왕 시대)에는 "와카나(和歌菜, 테이 도)는, 동생(童形) 때 오명(汚名)을 쓰고 난징에 학문을 배우러 건너가, 연(年) 오래 하여 귀국한 고로, 야마토(大和, 일본)의 풍(風)을 알지 못하는 고로, 천하의 대사에 미치게 되었구나"라고 기록되어 있다.[8] 또한 같은 책에서는 그의 외모를 "육척(六尺) 정도 되는 검은 남자"라고 전하고 있다.[8]
3. 평가 및 유산
오야카타 칭호를 받았으며, 구메 삼십육성의 후손이다. 16세에 명나라에 유학하여 난징의 국자감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여러 차례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구메촌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신을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삼사관이었던 조간 오야카타 모리히사를 모함하여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4]
1608년 9월, 시마즈 이에히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공을 요구했지만, 사명은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모욕했다.[5] 이로 인해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이 시작되었다.
1609년 류큐 침공 당시 사명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여러 사료에서 사쓰마군이 나하로 이동하기 전후 쇼네이왕이 삼사관을 인질로 보냈다는 점은 일치하며, 사명은 삼사관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일부 사료에서는 사명이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저항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료와 모순되며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6]
1611년 9월 19일, 사쓰마 번에서 쇼네이왕과 삼사관에게 기청문(起請文)을 제시했지만, 사명은 홀로 서명하지 않고 항변하다 참수되었다.[7]
정사 "구양(249호)"에서는 사명이 사쓰마 번에 무례를 저질러 정벌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안의 "기안일기"(쇼호왕 시대)에서는 사명이 일본의 사정을 잘 몰라 큰일을 일으켰다고 평가하며, 그의 외모를 "키가 크고 검은 남자"라고 묘사하고 있다.[8]
테의 달인이었으며, 처형될 때 사쓰마 번병 여러 명을 함께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9] 묘는 없지만, 문중(일족)이 세운 현창비가 나하시 와카사의 아사히가오카 공원에 있다.
4. 대중문화 속의 자나 우에카타
- 이마무라 쇼고의 소설 『세 평의 해변의 약속』 ( PHP 연구소, 2023년, 『전국 무장전 서일본 편』수록)[1]
- NHK 대하드라마 『류큐의 바람』 (1993년 1월~6월, 연기: 에모리 토루, 더빙: 야기 마사오)[2]
참조
[1]
서적
Okinawa rekishi jinmei jiten
Okinawa Bunka-sha
1996
[2]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Tuttle Publishing
2000
[3]
서적
[4]
문서
[5]
문서
「南聘紀考」
[6]
문서
「喜安日記」「琉球渡海日々記」「肝付兼篤書状」
[7]
문서
[8]
문서
喜安日記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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